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경궁 명정전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명정전.png|width=100%]]}}} || || {{{#gold ''' 〈동궐도〉 명정전 '''}}} || 1483년([[자을산군|성종]] 14년) 옛날 [[태종(조선)|태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창건할 때 함께 지었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 [[서거정]]이 지었으며 상량문[*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이나 공사 과정, 일시 등을 적어둔 글.]은 [[승정원#S-3|우부승지]] [[김종직]]이 지었다.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이는 [[풍수지리]] 및 지형 문제에 근거해 배치한 것이다.[* 이는 [[창경궁]] 전체 축이 그렇다.] 이 때문에 [[성종(조선)|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명정전은 동쪽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명정전에서 열린 행사는 크게 중요한 국가행사보다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행사나 왕실의 잔치 등이었다. 명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인종(조선)|인종]]이 유일하다. [[창경궁]]에서 왕이 승하해도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창경궁은 창덕궁에 비해서 정치적 기능보다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이 컸던 탓이다.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른다. 즉, 명정전은 '''현존하는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따라서 [[17세기]] 초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에 명정전을 가장 알뜰살뜰 사용한 임금은 [[영조]]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자 66세가 되던 1759년(영조 35년)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를 이곳 명정전에서 계비로 맞아들였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유흥 · 여가시설 [[창경원]]이 되면서 일제가 명정전 행각을 철거하고 박석을 걷어 [[벚나무]]를 심는 등 크게 훼손했다. [[8.15 광복]] 후인 1963년에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보수했고, 1983년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환원되면서 관련 시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이후 복원, 수리 공사를 하여 1986년에 마무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